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화민국 국회 해산 (문단 편집) === 명류내각의 출범 === [[선후대차관 사건]]으로 국무총리 [[자오빙쥔]]이 사퇴한 이후 육군총장 [[돤치루이]]가 2개월 동안 국무총리직을 대행했다. 국민당은 진보당과 위안스카이를 분열시키기 위해 진보당 당수 탕화룡에게 국무총리가 될 것을 권했다. 이에 진보당은 현내각 유지파, 진보당 내각 출범파, 연립내각파, 진보당이 참가하지 않는 신내각 출범파 등으로 분열되었다. 위안스카이는 돤치루이 대행 체제를 유지하면서 국회가 조각을 요청하면 그때에 온건파 정치인인 장건, [[쉬스창]], [[슝시링]] 중 한 사람을 새 총리로 위촉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1913년 7월, 위안스카이는 장건에게 총리가 될 것을 요청했는데 장건이 거절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쉬스창을 총리로 천거했으나 진보당에서 쉬스창은 국민당에서 반대한다는 이유로 진보당원인 열하도통 슝시링을 내세웠다. 이에 1913년 7월 31일 진보당과 국민당 모두의 지지를 받으면서 슝시링이 총리가 되었다. 이는 슝시링을 총리로 지지했던 위안스카이의 입장에서도 의외일 정도의 지지였는데 국민당 측에서 자신들이 총리를 내세울 수 없으니 진보당 측 인물을 지지한다는 방침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쑨바오치]]를 외교총장, 주자제를 재정총장에 임명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슝시링의 동의를 요구했다. 슝시링은 이에 불만을 품고 쑨바오치와 주자제의 임명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하면서 8월 28일 총리에 취임했다. 슝시링은 내각을 조직하면서 제1류의 인재들만 모아서 내각을 출범하겠다는 표시로 자신의 내각을 명류내각, 혹은 제일류인재내각이라 불렀다. 하지만 [[북양군벌]]이 장악한 육군총장과 해군총장은 슝시링이 임명할 수 없는 처지라서 나머지 7개 부서의 총장만 임명할 수 있었다. 슝시링은 [[량치차오]]를 재정총장에 임명하려 했으나 위안스카이가 주자제를 유임시키라고 압박하자 하는 수 없이 쑨바오치를 외교총장에, 주자제를 교통총장으로 유임시키고 자신이 재정총장을 겸임했다. 9월 11일 발표된 내각에는 내무총장 주계검, 교육총장 왕대섭, 사법총장 량치차오, 농상총장 장건, 외교총장 쑨바오치, 교통총장 주자제, 육군총장 돤치루이, 해군총장 유관웅이었다. 이중에서 슝시링 자신과 량치차오를 제외하면 왕대섭과 장건만 진보당원이었고 장건과 왕대섭은 위안스카이와 특수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진보당 내각은 슝시링과 량치차오 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